고사리 <무제>展: 이립(而立)의 종막을 둘러싼 시각적 회고
-김연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1. 고사리 월드와의 도킹(docking)
오래 전의 일이다. 군대를 다녀온 후 학부 2학년으로 복학하자마자 가장 처음으로 수강신청 바구니에 넣었던 수업은 <창작사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당시에는 최신 사양의 스마트폰도, 자신의 일상을 불특정 다수의 온라인 사용자들과 공유할 수 있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도 존재하지 않았다. ‘초고속 인터넷’이라는 건 우리의 일상이나 인식에는 존재하지 않던 개념이었다. 나처럼 기술문명에 관한 실제적 관심이 크지 않았던 이들에게는 후지필름이나 코닥의 퀵스냅 일회용 카메라만 있으면 지구상의 어디를 가더라도 든든하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내 눈을 통해 망막에 맺힌 특정 대상이나 그 날의 인상적인 분위기를 한 장의 프린트로 출력하여 반영구적인 소유물로 보관하고, 틈날 때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앨범을 꺼내 당시를 회상했던 아날로그적 감성은 어느덧 일정 나이 이상의 세대에게만 통용되는 비눗방울과도 같은 기억으로 변해있었다. 일회용 카메라는 복잡한 기계적 조작이 필요 없었다. 뷰파인더와 셔터 그리고 일회용 카메라의 상징인 필름이송레버, 이런 효율적인 구성에 경제적 저렴함까지 갖추었기에 사진에 매력을 느끼고 있던 나 같은 애송이에게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지금도 본가에는 나의 무작위 셔터 누르기로 세상의 빛을 본 죄 없는 사진들이 어느 방 한 구석을 점령하고 있다.
그런데 <창작사진> 수업의 등장은 나에게 궁금증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손재주는 없었지만, 학교 장비실에 비치된 초고가의 수동 카메라를 조작해보고 또 암실에서 필름을 직접 현상하는 과정을 직접 해볼 수 있다는 강의계획서의 설명은 분명 매혹적이었다. 이후 학기 내내 배운 기본적인 사진 이론을 적용하여 기말 과제를 제출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어느 대상이든 촬영하여 컬러와 흑백으로 현상 후 총 넉 장을 제출하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그 조건은 그로부터 다시 이십여 년이 지나 고사리를 만나면서 소환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대상에 대한 ‘애정’을 담아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사진은 어느 대상을 지정하더라도 찍는 사람의 선택과 관심이 기반이 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숨겨진 의도를 고민하다보니 어느새 제출마감 기한이 다가왔고 난 선택을 해야만 했다. 학교 주위를 여러 번 배회한 끝에 비로소 건물 구석에서 찾아낸 건 슬라이드 필름을 보관하는 서랍장이었다. 오랜 시간 과에서 사용했지만 결국 불용처리로 인해 앞으로의 미래를 걱정하듯 외롭게 서 있던 서랍장은 일정 시간 이상 버려지고 방치되어온, 그렇지만 학과 학생들이 켜켜이 쌓아온 학업에 대한 열정과 고민의 흔적이 온존된 존재였다. 난 선택된 서랍장 중에서도 서랍 한 칸, 특히 그 서랍을 열기위해 반드시 손으로 잡고 당겨야만 했던 쇠고리를 접사(close-up)하기로 결정했다. 마치 후크 선장의 의수를 대신하는 갈고리를 연상하게 한 쇠고리를 택했던 이유를 되짚어보면, 서랍장에게 주어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여러 공식적, 개인적 목적과 이유들로 인해 인간 ‘객체’의 물리적 접촉을 경험했다는 점, 그리고 비인간 ‘객체’인 서랍장이 보관했던 인간 객체와의 숨겨진 이야기를 살펴보기 위한 최초의 접점으로서 인지했다는 점에 기인했던 것 같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당시에 나는 서랍장과 같은 기능적 활용에 초점을 둔 사물들을 대상으로 한 의인화 작업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고 또 이용이 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전제로 폐기처분을 당해야만 했던 그 서랍장, 그 중에서도 특히 미시적 구성요소인 쇠고리를 접사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을 평등한 독립적 객체로서 바라보고자 했던 건 아니었을까.
이제 그 서랍장과 쇠고리는 어디에 있을까? 먼 기억을 회상하며 현재로 돌아왔을 때 나는 고사리가 거쳐 온 근 사십 년 간의 삶의 궤적과 마주하게 되었다.
2. <무제> 안으로
강릉에 소재한 대추무파인아트에서 진행 중인 고사리의 이번 전시 제목은 ‘무제(無題)’다. 보통 무제라는 단어는 특정 미술작품의 제목으로는 확인할 수 있지만, 전시 전반의 주제어로서 채택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러나 이번 고사리의 개인전의 사례는 예외에 해당한다. 이런 단언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고사리의 지난 시간과 경험들이 ‘무제’라는 단어의 다원성, 포용성, 경계초월성의 속성을 고스란히 머금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전시 서문을 쓴 한승은의 글을 일부 인용해보고자 한다.
무제(無題, untitled)는 괄호다. 괄호는 비어 있다는 걸 표시하는 최소한의 손짓이다. 이만큼, 이 정도 비어 있다는 건 그만큼, 그 정도 열려 있다는 뜻인 한편 열려 있음을 닫혀 있음과 구분하는 경계를 내비친다...(중략)... 고사리라 불리는 사람은 고사리의 사전 정의에 실리지 않은 정의를 살아가는 한 명,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에서 고사리의 새로운 정의를 몰래 덧붙여나가는 한 작가이다.
위의 인용문을 전시회에 대입해보면 무제는 결국 ‘제목이 없는 제목’과도 같기에 해석하는 이의 관점에 따라서 하나 이상의 규정된 정의에 머무르지 않고 무수히 많은 주정적(主情的), 자의적 정의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개방형 언어이자 경계로서 기능한다.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의 제목인 <무제>, <숨>, <이립의 자세 (동일 제목의 애니메이션 포함)>는 해당 작품을 대하는 관람자들의 마음속에 침투하여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들과 고사리 사이의 정신적 상호작용을 고취시키는데 기여한다. 그렇기에 고사리의 작업들을 바라보는 관람자는 유사한 외형적 형태나 내재적 맥락을 갖고 있는 타 작품들을 무리해서 대입시키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보는 이의 마음에 떠오르는 구상적 대상, 추상적 심상이 자신만의 고유한 제목이자 의미로서 유효성을 갖는다. 관람자 개개인의 관념적 경험과 해석이 허용된다는 맥락인데, 고사리는 이러한 그들의 행위를 반갑게 맞아들이는 것은 물론 작가로서의 통상적인 지위와 역할을 벗어던지고 자연스레 관련 상황과 융화되어 전통적으로 폐쇄적이면서도 제의적 공간으로 위치해 온 전시공간을 관람자 친화적(visitor-friendly) 환경으로 전환시킨다.
이제 서서히 전시장 내부에 있는 작품들에 눈이 가기 시작한다. 1층에는 두 개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전시장의 가장 큰 영역을 점유하고 있는 설치작업이 관람자들의 시선을 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시장 1-2층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형태의 작업인데, 본 전시에서는 <무제 (Untitled)>라는 제목으로 전시제목과 일치하는 유일한 사례임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전시공간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비닐 띠 개체들의 군집이다. 이 작업에 대해 고사리는 해외 체류에서 돌아오자마자 그간 자신의 내면에 응축되어 왔던 생각과 감정을 펼쳐본 사례로서 언급하고 있다. 그는 사 년 간 여러 나라와 지역을 돌면서 내가 어디에 있는가, 서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이립 시기의 고민에 휩싸였는데, 이때 도출한 결론은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즉, 고사리 자신이 어디든 갈 수 있는 용기, 나만의 다른 세상, 아무런 정보가 없는 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 등의 개인적, 상대적 인식론을 성숙시켜 나가는 것에 방점을 두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관람자는 수직으로 길고 긴 롤 형태의 1회용 비닐봉지 띠들을 확인할 수 있다. 고사리가 직접 재단한 띠들이 군집화 되어 있는 형태인데, 관람자는 한발자국만 안에 들어가는 순간 전혀 다른 이질적인 시지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고사리는 이 작품에 대해 자기 내면에 응축된 또 다른 나의 감각을 느끼고 싶어 제작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사리는 작품을 직접 경험한 관람자들의 소회를 적극적으로 채집했는데,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주어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그간 마주하지 못한 이질적 공간의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경우 그 해석은 개인적이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데서 기인한다. 따라서 작품의 제목이 <무제>인 이유는 해석의 여지를 관람자 개인에게 맡겨버렸다는 의도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관람자가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 의거해 어떤 의미를 내적으로 생성하게 유도하는 일련의 과정은 보는 사람 개개인의 경험과 해석을 소중히 보관하고자 하는 고사리의 배려와 고민이 스며있다.
3. <숨>: 사라져 가는,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관심의 투영
<무제>가 전시장의 물리적 영역을 상당 부분 잠식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설치작업 <숨 (Breathe)>의 존재감은 이에 뒤지지 않는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숨>은 고사리의 작업들 중에서 소위 ‘미술사적 문법’에 최적화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미술사적 문법이라는 수사는 어디까지나 작업의 표피적 인상에서 비롯된 자의적 해석일 뿐이다. 이 작업은 숨에 대한 고사리의 세계관이 응축된 형식으로 담겨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다.
우선 진열된 형식을 보면 한 쪽에는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생존을 가능케 하는 행위인 숨이라는 비가시적 존재를 담아낸 비닐봉지들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이를 시멘트로 떠낸 포대자루들이 형태가 분명한 물리적 덩어리의 집합으로서 위치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고사리는 이 일련의 과정을 두고 “비 물리적인 것의 생성, 이동, 파손, 소멸 과정을 지켜보고자 한다.”는 의도를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여기서 <숨>에 관한 설명이 매우 직관적이면서도 압축적 방식으로 제시되어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상기된 공식적 설명과는 별개로 고사리의 작업 의도는 본인의 삶의 태도와 또 다시 연결된다. 고사리는 <숨>을 제작할 때 ‘숨’이 어떻게 말을 하고 생각을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평상시 본인이 버린 쓰레기들 중 비닐이 제일 많았기 때문에, 숨을 비닐봉지에 묶음과 동시에 지인들에게까지 봉지를 나눠주고 그들의 ‘숨’을 요청하여 이를 한 곳에 모았다. 이후 고사리는 다양한 숨과 비닐봉지의 군집이 어떤 논리성을 드러내는지 궁금해 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숨이라는 비가시적 존재를 덩어리 감으로 떠낼 수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고사리는 비닐봉지에 분 숨만큼 시멘트를 주입해서 덩어리 크기만큼 떠냈다.
숨이 들어간 비닐봉지들과 이를 덩어리 감으로 떠낸 시멘트 자루들, 그리고 이를 실현시킨 중간 과정들을 총체적으로 되짚어보면, 궁극적으로 고사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을 투영했다고 볼 수 있다. 숨을 교환할 수도 있고 또 깨뜨려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은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태도를 취하는가에 관한 고사리의 삶의 고민을 실체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숨과 비닐봉지는 30대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고사리의 작품 세계에 다시 소환되어 특정 시간적 시점에서 ‘이립’의 동시대적 의미를 고찰하게 만드는 동시에 정체성의 재탐색을 돕는 도구로서 작동한다. 참고로 고사리의 ‘비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저렴한 것은 물론 불필요한 대상을 버리기 위한 소재로서 비닐을 많이 떠올리겠지만, 고사리의 비닐은 애정이 느껴지는 대상을 생명체로 전환시킨 후 이를 싸서 그 생명체의 본성과 남겨진 기억들을 온전히 보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다. 이는 <숨>은 물론 성북동의 버려진 고택을 비닐로 포장하여 거주자들의 기억과 추억을 보존하고자 했던 <이사> (2018)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사람은 물론 물건, 생활 및 추억 등의 이동은 만약 기존에 거주했던 집을 하나의 생명체로 간주했을 때, 이사는 곧 생명체의 소멸이라는 공식에 논리적 개연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숨>과 <이사>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고민이 작업적 실천으로서 구현된 사례라는 점에서 미루어볼 때, 비닐은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일관성 있게 유치해왔던 고사리의 가치관을 대변해주는 물질적 조형언어이자 매개체로서 ‘이립’ 이후의 인간 그리고 작가로서의 인생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소재가 될 수 있다.
4. <이립의 자세>: 작가 고사리의 시작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삶의 태도
전시장 1층과 2층을 연결시켜주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정면에 서른 개의 소형 캔버스들이 관람자들의 눈에 들어온다. <이립의 자세 (The Posture of Standing)>는 열 개의 소형 캔버스들이 세 줄로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캔버스는 마치 특정 엠블럼(emblem)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다. 연속과 불연속적 형상은 연필만이 갖고 있는 매체적 속성에 의해 채워진 배경 안에 부유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각 형상에 숨겨진 상징적 의미를 탐색하게 만든다.
<이립의 자세>에서 이립은 관람자에게 고사리의 작업 의도에 관해 궁금하게 만드는 일종의 은유로서 자리한다. 전시 리플렛에 이 은유는 물론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한 힌트가 일부 소개 되어 있는데, 오히려 이 힌트의 배경이 되는 고사리의 지금까지의 생애를 확인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고사리의 생애와 삶의 태도가 곧 이번 전시의 핵심 주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고사리는 어떻게 보면 보잘 것 없지만 하나하나의 존재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수집 및 보관에 열과 성을 다했던 아버지 그리고 남편과 딸의 거주지이자 울산 노동자들의 하숙 공간이었던 여인숙을 운영하면서 계속 물건들을 치우고 정리하는데 여념이 없던 어머니가 이루어내는 집안 환경에 익숙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후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가서 처음 마주쳤던 문화적 충격, 홀로 살게 되면서 고민하게 된 외로움과 버려지는 대상에 대한 숙고 등의 경험은 20대의 고사리가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들어준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어찌됐든 ‘독립’을 이루기 위해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시작한 고사리는 작업과 학위논문 작성이라는 과업을 수행해야 하는 대학원생의 삶과 후학양성을 통해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20대 후반의 사회인으로서의 삶을 병행했다. 고사리는 27세의 시점부터 홀로 거주하던 옥탑 방에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회고한다. 낮은 벽면에서 시작된 천장이 돔 형태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조의 옥탑 방은 고사리에게 있어 거주지이자 작업실로서 각별한 의미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마주하게 된 ‘이립’이라는 단어가 그의 작업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어로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 단어는 고사리에게는 어쩌면 하나의 수수께끼였을지도 모른다. <이립의 자세>를 구성하는 서른 점 중 총 다섯 점이 옥탑 방에서 완성이 되었는데, 이 작업에 대한 작품 설명을 인용해보면,
(중략) 가로등이 비추는 그 길에 나는 우뚝 서 있었으나, 나의 몸과 이어져 있는 그림자는 바닥에 누워있었고, 조금 더 걸어 담벼락 옆을 지나갈 때의 나는 그림자와 함께 서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서 있는 그 길 위에서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한들 그것이 정말 서 있는 것인지, 누워있는 것인지, 구부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그저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자세와 태도만이 나를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위의 내용은 고사리가 우연히 읽던 책에서 발견한 공자의 언어인 이립에 자신의 현실과 대입시키면서 느꼈던 감정의 일부를 드러낸다. 결국 이립이 자신에게는 일종의 고통으로서 다가왔다는 고사리의 고해 그리고 상기된 수수께끼의 진의를 납득하기 위해서는 유교의 시조이자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인 공자(孔子 또는 孔夫子, 기원전 551-479)의 언행집인 <논어(論語)>를 주목해야 한다. 이를 통해 ‘이립’에 얽힌 고사리의 기억과 시각적 형상화를 위한 개념화 작업 간의 연관성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전자의 경우를 보면 이립은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소개가 되고 있다. 이립은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 개념이 공자 자신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공자는 스스로 “30세가 되어 뜻이 확고하게 섰다 (자립했다)”고 언급한다. 이립의 입(立)은 몸이 안정되어 동요하지 않는 것을 이르는데, 그 이야기는 곧 자신의 주관이나 가치관이 뚜렷해야 함은 물론 주변에서 확실하게 인정을 받아야 함을 나타낸다. 고사리에게는 공자의 언어가 자신의 현재 위치와 극명하게 대비된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신체적 일어서기가 아닌 자신의 삶의 태도와 방향성이 정립되었는가를 객관적으로 고민했던 것이다. 고사리는 이 작업을 끝으로 사 년 간의 외국 생활을 시작한다. 이 선택은 궁극적으로 ‘작가’ 고사리에게 또 다른 삶의 기쁨을 전하게 된 계기가 되며 자신만의 ‘이립’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30개의 드로잉 캔버스에 시선을 뺏기다가 몸을 180도 돌리면 <이립의 자세 (The Posture of Standing)> (2020, 애니메이션)과 마주한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동시대 전시 관행을 보면 주제의식의 강조를 위한 시각적 어법으로서 상호보완적 성격의 작품들을 마주보게 하는 진열 공식을 자주 목도하게 된다. 2층에 있는 동일 제목의 작품들도 상기한 해석과 부합하는 사례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 작품은 3분가량의 흑백화면으로 구성된 일종의 무성 영상이다. 특히 대상을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촬영한 영화나 기술을 지칭하는 용어인 애니메이션 기법을 적용하고 있는데, 고사리는 이 작업의 배경이 레지던시에서 만났던 영상 제작을 주로 하는 작가 분께 기술적 노하우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서른 개의 캔버스들이 만들어내는 각양각색의 화면들이 초 단위의 기계적 세팅을 두고 벽면의 한 공간에 순차적으로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마치 조명의 점멸을 떠오르게 하는 이 애니메이션은 아무런 소리 없이 수 분간 상영된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이립의 자세>의 캔버스 버전과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 영상 버전은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고사리의 삼십년간의 삶의 자세를 파노라마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걷고, 서있고, 구부리고,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이 시시각각 변화하게 되면, 고사리가 자신의 인생을 두고 의문시했던 질문들에서 그치지 않고 개인적 차원의 삶의 기억을 마치 스토리텔링 차원에서 소환하게끔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귀국하기까지 작가로서의 정체성 변화를 회고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에 고사리는 말한다. 비록 ‘이립’이라는 단어가 자신에게 일종의 고통으로 다가왔고 그때마다 자신의 삶의 태도나 방향성을 어떻게 설정해야할 것인가를 고민해야할 정도의 무게감을 전달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립’의 시기가 끝난 고사리에게는 그때만큼 삶의 격정적인 부분을 앞으로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공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고사리는 자신을 세우고자 분투했던 30대를 뒤로 하고, 어디까지가 자연이며 또 삶인지를 고민하는 불혹(不惑)의 40대를 경험하고 있다. 고사리에게 전시공간은 그의 세상을 보여주기 위한 또 다른 부수적인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보금자리인 우이동에서 마을 공동체 주민들과 제철 농산물을 수확하기 위한 일련의 시간과 과정 역시 고사리에게는 중요한 작업장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 생을 살아가기 위한 중간 상태로서 수분이 상당히 빠져버린 농작물이나 열매를 전시하는 과정에서 명명한 <땅의 별> (2022), 누군가에게는 필요 없는 쓰레기일 수 있지만 자신에게는 땅에서 얻는 보물로서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발효하여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퇴비를 소재로 삼은 <퇴비언덕> (2022)은 화이트 큐브의 배타성이나 엘리트주의적 사고를 해체하는데 기여한다. 예를 들어, 수확 이후의 열매가 일정 시간이 지나 부스러지고, 땅으로 돌아가고, 퇴비가 되어 또 다른 생명으로 개화한다는 일련의 순환논리는 나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이립’의 시기와 오버랩 된다. 개화는 곧 봄을 의미하고 이것이 입춘(立春)이라는 맥락에서 이립과 조응하기 때문이다. 고사리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우리의 삶 곳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산하고 있는 어떻게 보면 대단치 않은 존재들을 일관된 자세로 관찰하고, 마주하고, 힘껏 감싸 안는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일부로서 이 존재들을 받아들이고 연민을 느끼며 공생하는 고사리의 삶의 태도는 인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관람자의 입장에서 이에 위화감을 느낄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5. 종언: 고사리 월드와의 기약
어느 모처에서 이번 전시를 위한 글을 위해 고사리의 지난 40여 년간의 삶을 함께 되돌아본 후, 문득 작가에게 있어 전시와 관람자에게 소통의 매개체로서 제시되는 텍스트와의 관계성이 어떤 의미로 수용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사견이 궁금해졌다. 작가의 페르소나는 작품이고 그 군집은 기획자의 의도가 덧붙여지면서 전시라는 메시지를 형성하게 된다. 전시는 관람자에게 특정 의도를 수동적으로 흡수하게끔 물리적 환경을 조정 또는 제약하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들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인식을 고양할 수 있는 능동적 속성의 사회적 경험을 유도하기도 한다.
고사리는 소외, 배제, 눈에 보이지 않는 스쳐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명한다. 그 관심은 전시를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의 생명력을 약속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삶의 태도를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관람자들의 내면에 작은 울림을 선사하기도 한다. 고사리는 이번 전시를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회고이자 일종의 정리로서 느끼고 있음을 표명했다. 담담한 태도로 현재를 정리한다는 취지 아래 기획된 이번 <무제>전은 고사리에게 넘겨진 40대의 십 년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채워지고 또 기억될지를 가늠하게 하는 인상적인 시험무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