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는봄
배우리 기자 (월간미술) _ 월간미술 4월호 크리틱/ 배우리, 월간미술 447호, 2022.04
이전시는 죽음으로 시작해서 부활을 거쳐 한 바퀴 빙 돌아 생을 살고 다시 죽음을 통해 빠져나가게 되어있다. 인간보다 먼저 지상에 태어나 6600만 년을 살아온 고사리가 보여줄 거라곤 살과 죽음의 연속일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수분이라고는 없는, 말라비틀어진 정물들에 둘러싸이게 된다. 수확하다 버려진 농작물 이파리들, 밤껍질, 양파껍질, 길게 깎인 사과껍질 나뭇가지 등이 매달려 죽음을 전시한다. 생기는 족족 버리기 바빠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들을 일일이 호명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죽음이라기보다 ‘쓰레기’다. 그곳에 ‘시래기’가 있었나, 어떻게 보면 쓰레기도 시래기로 살려낸 선조들의 지혜처럼 고사리에게도 버린다는 개념이 없다. 모든 것은 생의 한 과정이며, 다음 생의 양분이기 때문. 그야말로 잠시 정지되었을 뿐 '무생물'이나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공중에 떠올라 반짝이는 <땅의 별> 성단 너머에는 동그란 봉분이 자리한다. 어떤 '땅의 별'은 이곳에 져서 다음 생을 준비하고 있다. 고사리는 ‘드는봄’, 입춘 전에 아직 얼어있는 퇴비 더미를 이곳으로 옮겨왔다. 갑자기 흙의 환경을 바꾸어 미안한 마음, 그리고 흙과 그 속의 생명들이 혹시 목마르진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매일 와서 흙무덤에 물을 주었다. 한 달이라는 전시 기간 얼었던 땅은 녹았고 작은 생명들은 그의 노고를 알기라도 하는 듯, 어두운 전시장 안에서 매일 조금씩 자라났다. 지렁이들은 흙무덤에 숨구멍을 내고 아주 조그마한 '날살이'들은 봉분 주위를, 땅의 별 주위를 날아다닌다.
전시장에 오랜 시간 있지 않으면, 혹은 빛에만 정신이 팔려있으면 희미하게 돌고 있는 <해와 달>의 존재를 놓칠지도 모른다. 해와 달은 각각 죽음과 생을 보듬으며 빙-빙 돌고 있다. 그래, 어차피 철(계절)없는 사람들은 해와 달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에 관심을 가질 일이 없다. 정말로 해와 달과 별과 땅은 이제 인간의 삶과는 별로 상관없는 것이 되었다. 식물은 이미 망가진 땅에서는 자랄 수 없어 실내 공장에서 인공불빛을 받으며 물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고, 덕분에 제철 채소와 과일조차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니까. 하지만 고사리는 아직도 해와 달에게 의지하는 처지다. 작가 고사리가 보기에 땅과 함께 생을 보존하는 것, 먹고 먹히며 서로 살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니 이곳에 해와 달과 별과 지구를 퍼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가 퇴비를 전시장에 오게 했나. 지난 20년간 도시와 부동산을 주제로 한 전시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진격을 막을 수는 없었듯이, 어쩌면 이제는 해와 달과 별과 지구와 영영 헤어져야 하는 때가 도래했음을 고사리는 알린 것일 수도 있다. 그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건 전시장에 죽은 상어나 살아있는 말이 등장했던 시대보다는 미술하는 인간이 아주 평화롭고 온건하게 생명과 함께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괜히 고뇌하는 척해봤자 고사리는 그저 일상이라며 웃어 보일 것이 뻔하다. 전시 이후 팔리는 것도, 버려지는 것도 없는 걸로 봐서 고사리는 '그냥 자연'이다.
전시를 연 고사리는 식물 고사리만큼이나 땅에 붙어살고 유들유들하다. 어느 것이든 바로 버리지 않고 그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관찰하고, 매일 생태 텃밭이 있는 산 중턱에 올라 식물이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것이 일과인 고사리. 4월 초 고사리의 텃밭에서는 시농제가 열릴 것이다. 전시보다도 도시에서 사람들과 함께 절기를 쫓아 생태적인 방식으로 밭을 일구고 관리하는 것이 더 어려운 '작업'으로 비쳤다. 고사리의 진짜 작업은 그곳에서 자란다.
이왕 씨알콜렉티브 전시이니, 함석헌 선생이 남긴 구절로 글을 마무리한다. "기적 기적 권능 권능 하지만 흙에서 밥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권능 있는 기적 아닌가? 시라 그림이라 음악이라 하지만 바위에서 꽃이 나오고, 똥에서 과일이 나오는 이거야말로 정말 예술 아닌가? 지식 학문하지만 아무리 발달했기로서 기초의 기초되는 밥과 옷 만들기를 잊어버린 지식이 무슨 지식일까?" (함석헌 전집 4: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한길사 1983 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