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와 함께 대굴대굴 조물조물, 세계-만들기
고사리 작가의 제비집 연작들
이은정(문예미학자)
대관령은 아흔아홉 구비의 고갯길이다. 넓게는 영동과 영서, 좁게는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강릉과 평창 사이를 연결한다. 고개가 험해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이 음차되어 대관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이름 풀이도 재미나다. 그런데 대관령은 옛길이다. 굳이 대관령을 목적지로 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더 이상 이 고개를 넘지 않는다. 계곡을 가로질러 90~98m 높이로 설치된 33개의 교량과 태백산맥 중턱을 뚫어놓은 7개의 터널을 통과하는 영동고속도로의 대관령 구간을 이용하거나 백두대간 지하 400m 밑에서 직선으로 곧장 21.755km를 내달리는 기차를 이용한다. 사람들이 새길을 이용하니 옛길이 된 것이다.
사람은 길을 낸다. 자연의 형세 속에 발길을 내는 길도 길이고, 인생의 주어진 시간을 한 발짝씩 차곡차곡 쌓아내는 것도 길이다. 제비집을 살피러 강릉중앙시장 골목들을 함께 걷고 있을 때 고사리 작가는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을 울산에서 듣고 자랐는데, 강릉에 오니 ‘태어났으면 대관령은 한번 넘어 봐야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본태성 서울 출신인 나로서는 저 아래 남쪽 바다 지역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나 저기 저 동쪽 바다에 면한 마을에서 아흔아홉 구비의 대관령을 넘어가는 길이 모두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내 마음에는 ‘손’과 ‘발’에 대한 어떤 상념들이 맺어졌는데, 강릉 명주예술마당에 전시된 고사리 작가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더욱 선명해진 느낌이었다.
<제비 자리>, <제비 고개>, <제비 은하수>, <제비 이야기>. 작품의 제목들이 알려주듯이 고사리 작가는 강릉에서 머문 팔 개월여의 시간을 제비들을 살피는 일에 몰두했다. 아마도 한동안은 제비가 작가의 마음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그 시간을 응축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제비 자리>는 한지 위에 강릉 남대천에서 가져온 진흙과 지푸라기들을 점성을 가진 황토와 빚어 제비 둥지를 만들면서 남겨진 흔적이고, <제비 고개>는 구불거리고 휘어지고 돌아가는 듯 나아가는 대관령 고개의 숫자만큼 아혼아홉 개 제비 둥지를 투명한 낚싯줄에 매달아 놓은 설치작품이다. <제비 은하수>는 옛사람들이 음력으로 3월 3일 심짇날에 찾아와 9월 9일 중앙절에 강남(江南)으로 떠난다고 말하는 제비들의 조류학적 이동 경로와 무리의 크기를 동그랗게 오린 한지를 이용해 전시장 전면 유리창에 표시한 것이고, <제비 이야기>는 강릉시장 주변으로 둥지를 튼 제비들의 생태와 이들 곁에서 이들과 더불어 지내는 상점 사람들에 대한 아카이브 자료들이다.
제비는 인간의 거주지 주변으로 찾아와 잠시 머물다가 떠나가는 인간 친화적인 생물종이다. 일반적인 야생의 생태계는 인간이 거주하는 장소들과 경쟁하고 반목하는 반면, 제비는 야생 생물종임에도 인간의 장소로 찾아와서 그 곁에 머물려고 한다. 제비의 이런 특성 때문에 인간계에는 ‘제비가 살기 좋은 곳은 인간도 살기 좋은 곳’이라던가 ‘제비가 새끼를 많이 치면 풍년이 든다,’ ‘인심 좋은 사람의 집일수록 처마 가까이 집을 짓는다’ 같은 제비와 얽힌 많은 민담들이 존재한다. 판소리 <흥부전>은 인간이 보살핌 내어주면 제비는 풍요로움으로 보답할 것이라는 제비에 대한 민간의 호의적 시선을 권선징악이라는 인간의 윤리체계와 결합한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제비는 한반도의 ‘기후변화 생물지표종’이다. 현대인의 제비가 옛사람의 제비를 너무 멀리 밀어냈다. 1972년 6월 유엔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인간환경회의’라는 것을 처음으로 개최했고 ‘인간환경선언문’을 발표해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전 지구적 문제의식을 촉구했다는 거창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반대로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듯 보이지만 그럼에도 어느덧 뒤돌아보면 제비의 길과 너무나 어긋나 버린 인간의 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제비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은 비단 기후위기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인간이 만들어 낸 공간들, 인간이 주변 비인간 존재들과 맺는 관계의 성질이 모두 예전과는 사뭇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비는 농경지나 낮은 초목 혹은 목초지, 냇가나 개울 근처에 자리 잡은 인간의 거주지에 자신의 서식지를 마련하는 특성이 있다. 이는 둥지를 만들기 위한 재료 조달과 먹이 포획의 용이성 그리고 번식 상의 안전성 때문인데, 특히 제비는 습도와 바람에 민감하기 때문에 악천후로부터 자신과 새끼를 보호할 수 있는 단층 구조의, 둥지 접착이 용이한 벽면과 처마가 있는 집들을 선호한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종이 살아가는 대다수 경관은 철근과 콘크리트, 유리로 마감된 고층 빌딩들이 차지한다. (우리는 이런 빌딩들이 거대한 규모로 모여있는 곳을 도시라고 부른다.) 수직으로 높게 뻗은 빌딩들은 외부로부터의 차단을 중요한 기능으로 삼기에 매끈한 표면을 선호한다. 매끈함은 구부러짐이나 비틀림이 없기에 안과 밖의 들고 나는 유희를, 맞이하고 배웅하는 손들이 없다. 자기와 타자 사이에 ‘주다’와 ‘받다’, ‘온다’와 ‘간다’로 연결될 틈새(interstitial space)가 없으니 서로를 환대할 일도, 선물을 주고 받을 일도 없다. 제비가, 날씨가, 계절이, 자연이, 그리고 이웃할 사람이 그렇게 인간의 거주지로부터, 도시로부터 차단되고 있는 것이다.
고사리 작가는 강릉중앙시장에서 걸어서 10분 남짓이면 당도하는 남대천에서 고운 진흙과 지푸라기를 그러모아 제비집들을 만들었다. 자그마한 부리로 이곳의 진흙과 지푸라기들을 수백 번 이상 물어와 시장터 상가들의 차광막 아래, 조명이나 CCTV 장비 위에, 심지어는 골목 안쪽 깊숙하게 들어선 상점 간판 위에 둥지를 틀었던 제비들의 방식을 따라서 했다. 제비처럼 입 속의 침을 굴려 진흙에 점성을 더할 수 없어서 도자기를 만들 때 쓰는 옹기토를 섞었고, 진흙과 지푸라기를 “조물조물 (섞으니) 꼬릿한 향이 난다”고 <제비 이야기>에 적었다. 물질들과 만나는 눈의 감각, 코의 감각, 손의 감각이 이끌지 않았다면 결코 적지 못했을 표현이다.
제비에게 둥지는 단순한 재료로 환원되지 않는다. 강릉시장 터의 제비 둥지들은 알을 낳고 품고 새끼들이 부화하면 이들을 키우는 보금자리이자 두 번의 산란을 마치고 새끼들이 모두 성장하면 따스한 계절풍을 따라서 다 함께 남쪽으로 떠났다가 다음 해 봄이면 다시 돌아오는 고향 집이다. 제비들에게 둥지 짓기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한 노고이고, 경험이고, 추억이고, 생의 한 사건이다. 제비를 따라서 움직였을 고사리 작가의 손과 신체의 감각들은 바로 이 물질들에 관여함으로써 제비의 세계에 자신을 참여시킨다. 약간 거창하게 말하자면, 예술의 기원에 각인된 저 오래된 미메시스적 충동이 제비의 삶과 자신을 ‘상징적으로’ 연결하고자 시도한다고도 할 수 있다. 고사리 작가에게도 진흙과 지푸라기는 작품을 구성하는 재료들이 아니다. 물질(materials)과 물체(objects)는 다르다. 물질은 세계 안에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행위 주체자가 자신의 감각을 통해 느껴서 아는 것이다. 반면 물체는 인간의 도구적인 해석이 투사된 것으로 성질과 속성으로 파악되는 것, 이용가능한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강릉시장의 제비들이 자신들에게 허락된 최적의 조건과 환경에 맞추어 각자의 형태로 둥지를 짓는 것처럼 고사리 작가는 외양이나 형식이 아니라 손의 감각과 정서의 정동을 따라서 제비집을 빚어낸다. 그래서 두 존재 모두에게 주물 틀에서 벽돌을 찍어내는 것 같은 똑같은 크기나 모양을 가진 제비집은 없다.
수고로움을 아는 손, 거친 자갈들을 골라내고 고운 진흙만 건져내는 손, 물기를 흡수할 만큼 잘 말랐으면서도 충분히 부드럽게 휘어질 수 있는 지푸라기들을 찾아내는 손, 조물거리는 손바닥의 감촉이 ‘꼬릿한’ 냄새를 즐겁게 맡는 손. 고사리 작가의 소박하면서도 다정한 손들은 이전 작업들에서부터 차분하게 쌓아 올린 신체의 감각들과 연장선상에 있다. 잔디밭에서 잘려 나간 잡초들을 모으고 둥글려 새로운 존재성을 부여하는 감각, 그 존재가 날씨와 계절 속에서 대지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감각(<초사람>(2021)), 땅의 흙을 만지고, 밭을 고르고, 고추나 토마토, 옥수수 등의 작물을 키우고, 거두고, 말리기를 경험한 감각(<땅의 별>(2022), <땅의 별, 잡초>(2024)), 흙더미에 먹다 남은 음식물과 배설물을 섞어 발효시킨 퇴비와 여기서 창발하는 씨앗들과 벌레들과 곤충들을 맞이할 수 있는 감각(<퇴비언덕>(2022)), 둥치에서 탈락한 나무껍질이나 잎사귀들, 솔방울, 이끼, 돌들, 심지어 계란 껍질까지 사소하고 소소한 주변의 사물들과 유희할 수 있는 감각(<봉선화 물들듯 물들어>(2022))까지.
인간의 손은 깍지를 낄 수 있는 능력, 붙잡을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아닌 것(타자들)과 자신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서 사회성의 도구라고 불린다. 우리 신체에서 손은 가장 먼저 타자에게 다가가 그 낯섦을 감각하고, 접촉하고,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놓는다. “사물은 그저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생명체들의 서식 세계가 구김, 주름, 접힘의 방식을 통해서 사물들과 타자들을 맞이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사물은 명사가 아닌 동사이며, 생명체는 바로 그 사물들을 만지고 듣고 보는 감각적 지각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세계를 창발한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수렵채집을 하던 시절에는 돌뿐만 아니라 식물이나 곤충, 벌레, 동물 등과 교감을 나눌 수 있었으며, 이들을 영적인 존재로 대우했다고 적었다.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은 이러한 고대인들의 인식이 집약된 것으로, 자연적 존재들, 즉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면 비인간 존재들을 자신의 삶과 서로 얽혀있는 조응의 관계로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듯이 현대문명에서 비인간 존재들(돌, 식물, 동물 등등)은 유용성의 가치체계에 포획된 소유물로 전락했다. 동등한 자들 사이에서만 진정한 우정이 가능하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오랜 시간 곁 해온 친구를 잃었다. 친구와 대화하는 방법도 함께 말이다.
아마존 강 유역의 원주민들과 숲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한 캐나다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은 인간적인 이해 체계를 자연 세계에 투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체가 “거대한 자기들의 생태학”에 속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자기들(selves)이 아니다. 또한 단일한 자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행위주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기들이며, 다른 자기들과의 연결 속에서, 즉 자기가 아닌 자기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구성하고 자신의 존재를 창발한다. 사물과 비인간 생명체, 사물과 인간 생명체의 자기들은 느낌 혹은 정서의 실들을 날실과 씨실처럼 엮어내면서 관계를 만든다. 손이 감기와 풀기라는 기본적인 동작들을 통해 만들어 내는 것 또한 관계이고 연결이다. 진흙과 지푸라기를 조물거리는 작가의 손이 만들어 낸 것 또한 이런 점에서 우리가 잊고 있던 다른 자기를 향해 내민 대화이자 매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손만 연결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발 또한 걷기를 통해 연결을 만든다. ‘길’이라는 단어는 물리적이면서 동시에 은유적인 이음(joining)의 역할을 갖는다. 아흔아홉 구비의 대관령 길은 아스팔트 도로처럼 평평하지도 않고 동질적이지도 않다. 구릉과 언덕, 산들의 비스듬한 경사들과 불쑥 튀어나온 암석들, 낮은 곳으로 길을 내는 계곡의 구부러진 물줄기들처럼 대지의 지면과 조응하면서 구불구불 이어진다. 자동차가 달리는 길은 직선을 추종하지만 인간이 걷는 길은 대지에 순응한다. 인간의 걷기는 대지와 그것을 공유하는 비-인간 자기들의 유기적인 성장과 부패에 영향을 받으며 날씨와 계절의 순환에 상응한다. 그래서 대관령의 구불구불함은 밀물과 썰물의 틈새 시간에 모래사장으로 올라온 바닷가 달팽이들의 구불거리는 길을 닮았고, 먹잇감을 옮기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개미들의 갈지자로 휘청이며 나아가는 길을 닮았으며, 날씨와 바람에 조응하면서 9천여 킬로미터를 이동한다는 제비 무리의 뭉쳤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며 만들어 내는 길과도 닮았다.
한 사람의 발자국은 개별적인 길을 만들고, 여러 사람의 집합적인 걷기는 공공의 길을 만든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길을 냈고, 길이 났으니 사람들이 걷는다. ‘온다’와 ‘간다’는 사실 길의 입장에서는 동일한 국면들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리고 제비에게도 두 사태(온다-간다)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길의 은유적 의미가 시작되는 지점이 아마 여기일 것이다. 저 아래 남쪽 바다 지역에서 서울을 향해 올라가는 길과 저기 저 동쪽 바다에 면한 마을에서 아흔아홉 구비의 대관령을 넘어가는 길은 모두 일정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방향성을 갖는다. 인간의 삶은 상징적 지시가 필요하고, 그래서 보다 우월하다고 간주할 만한 행동 양식을 정해놓는다. 하지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식의 틀을 넘어서면, 우리는 매 순간의 실천들이 결코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삶과 얽혀있는 다른 자기들에게 귀 기울이는 법을, 이들이 우리를 어떻게 우리로 만들어 왔는지를,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 갈 우리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강릉 제비는 내년 봄에도 자신이 만든 둥지를 찾아 남대천 옆 강릉시장 터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내년은 분명 올해와는 다른 새로운 시작이리라. 흙과 퇴비, 나뭇잎들과 잡초들을 만지고 냄새를 맡고 수고로운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던 고사리 작가의 길이 강릉에서 제비를 만나고 제비집을 만드는 길로 나아간 것처럼 말이다. 고사리 작가와의 연루를 통해 도시살이에 익숙한 나 또한 다른 자기들로 가득한 이 세계를 읽는 법을 조금은 배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