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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사; 드나들지 않는 것들을 만나러 가다 (2018)

 

-임경민(JCC미술관 큐레이터)

 

작가에게 여러 차례 ‘이사(移徙)’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그 때마다 작가가 하는 이야기는 내가 아는 ‘이사’와 초점이 조금 어긋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전시장을 몇 번이나 오가는 사이 그 초점은 내가 알던 이사가 아니라 작가가 말하는 이사로 옮겨 맞춰졌다.

거처(居處)를 옮기는 일. 내게 이사는 일정하게 자리를 잡고 사는 곳인 거처를 옮기는 것이었다. 나와는 어딘지 다른 작가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뜻을 찾아보다 다른 한자로 된 거처(去處)를 보게 되었는데, 이 단어의 뜻은 작가의 이사에 바꾸어 쓰기에 맞춘 듯이 적절했다. 이미 갔거나 현재 가거나 미래에 갈 곳. 이런 곳이 옮겨 다니는 것, 그것이 바로 작가 고사리의 프로젝트 <이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이사할 때 필요한 것만 챙겨 새로운 집으로 간다. 그 곳은 다음 이사 올 사람을 위해 청소나 도배를 하는 등 단장을 하는데, 집의 입장에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이사’라는 것을 통해 함께 살 사람이 바뀌는 것인 줄 알게 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을 맞이한 집은 지난 12년 간 이사를 완성하고 새로운 사람을 맞이하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서로 배려해야 함께 걸을 법한 좁은 골목길을 꺾고 꺾어 전시장소인 집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아직 겨울의 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느낌의 생각보다 큰 마당과 함께 풍화가 진행 중인 것처럼 보였다.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닦고 살피고 탈 없이 잘 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없으면 쇠락해간다. 온기가 사라지고 눈비가 내린 후 습기를 제거해주는 난방도 없으며 집밖의 먼지가 불어 들어와도 쓸어치우는 이 없는데다 집 안의 벽이 삭아 가루가 되어 쌓여간다.

작가의 안내를 받아 청소랄지 내부철거 중인 그 집으로 들어갔을 때, 내부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일이 썩 유쾌하지 않았고 벽과 붙박이장의 문에 손이 닿을 때 망설였다. 몇 차례 오가며 다시 생각해보니 첫 방문의 기억이 달라졌다. 12년 동안 쌓인 것들을 두 팔 걷어붙이고 들어내며 살피는 사람을 너무나 오랜만에 겪는 집의 떨림이었을까. 그 집의 공기는 들떠있었던 것 같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마루의 삐걱임이 서로에게 실례될까 걱정하는 첫 만남이었는데 선뜻 어울리지 못하고 망설였던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스스럼없이 집에 스며들어 본인의 공간을 보여주듯 앞장섰던 작가를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그 날 마당에는 작가가 기와로 표식을 해 둔 손바닥만한 식물이 있었는데 다음 방문에서 팔꿈치만큼 자란 그 식물과 비닐이 덮이는 공간의 내부를 만났을 때 집은 보살핌을 받는 입장에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전시장소가 오래된 건축물 일 때는 시간의 맛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먼지와 곰팡이가 떠다니는 낡은 모습이 아니라 건축물 자체의 시간들이 드러나는 것이 더 좋다고 여겨왔고, 그런 공간의 특징과 있는 그대로 교류하려는 작가들을 많이 봐왔다. 그런데 고사리 작가는 달랐다. 한 겹, 두 겹 공기가 들어갈 만큼의 여분을 조금 주어가며 비닐로 내부 전체를 감싸나갔고, 처음에는 벽이 가려지는 것이 정말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업은 작가에게서 나오며, 설치라면 더더욱 작가가 작품을 완성하는 시간에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것들도 형성되기에 더 안타까워하는 것도 주제넘은 일이라 세 번째 방문이었던 오프닝까지 기다려 다시 그 집을 만났다.

이사는 완성되었다. 그래도 파마한 첫 날처럼 어색했지만 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어딘가의 틈으로 들어와 비닐을 부풀리고 빠져나가며 소리를 내는 집의 호흡과 함께 있음을 느꼈다. 집은 편안해졌다. 어깨를 움츠리고 얕은 숨을 쉴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되자 집의 차분함과 멋스러움을 볼 수 있게 되었다. 2층 화장대 옆의 창을 열었을 때 창밖으로 보인 마당은 어느 새 나무의 꽃들과 새로 자란 연녹색의 잎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작가는 건축업에 종사하시는 아버지와 오랜 세월 여인숙을 운영하시는 어머니 사이의 외동딸이다. 공간의 효율을 중시하는 건축 분야 일을 하셨던 아버지께는 일종의 저장강박이 있어 여인숙의 일부 방은 아버지가 가져오신 물건들로 채워졌다. 숙박을 위한 공간은 다른 방법으로 쓰였고, 그 물건들은 본래의 기능으로 쓰이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은 작가에게 집과 오브제에 대한 독특한 감각을 남겼다. 버려지거나 기능하지 못하는 물품을 소유한다는 것은 사물을 작품에 쓰이는 오브제로 전환하는 작가의 선택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공간에 대한 아버지의 양가적 태도는 모순에 가깝지만, 작가로서 기능과 소유라는 것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작가는 어느 집에 산 사람들의 기억이나 감정의 일부가 이사 나가지 못한 집 자체와 물품들에 남아 있는 것처럼 아버지의 물품이 가졌을 기억, 그것에 대한 아버지의 감정도 그랬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물건을 소유한다는 것이 물질의 측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만들어질 때의 목적을 더 이상 충족하지 못하면 소유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외국에서 4년을 지내는 동안 작가는 최소한의 짐을 꾸리는 데 익숙해졌고, 어디를 가나 소비의 목적이 되는 내용물을 뺀 비닐들은 쉽게 버려져 나뒹굴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살 곳에 대한 필요를 뛰어넘는 사람들의 집에 대한 소유욕은 엄청나서 기능할 수 있는 집도 허물고 다시 짓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지난 전시에서 만났던 집이 그랬다. 분명 갓 이사나간 사람들의 기운이 아직 집에 있었지만 그 집은 곧 다른 건물이 되기 위해 허물어질 예정이었다. 전시를 마지막으로 그 집은 해체되고 소멸했다. 그래서 비닐로 내부를 꼼꼼히 쌌던 그 집은 장례 절차 중 염(殮)에 빗대어 서술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설치작업을 염이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청소를 하고 내부를 수습한 후 감싸는 것이 염습(殮襲)과 행위의 측면에서 비슷하지만 그것은 분명 사망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이 되는 절차라 의미상 쉽게 연결 짓게 되지만, 나는 작가와 이야기하고 난 후 전시의 의미는 염이나 습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번 전시 <이사>의 과정과 완성을 보고나서도 나의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이 집을 떠나보내는 심정으로 공간과 마주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먼지와 곰팡이, 버려진 물건들과 집은 비록 보기에 허물어질 듯 마지막 모습에 가깝지만 분명, 그 시간동안 살아왔고 살아있음을 보여줄 수 있도록 전시는 진행되었다. 전시 막바지에 그리고 전시가 끝나고 난 후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사그라지는 것 같은 쪽은 집이 아니라 작가였다. 마당의 풀과 나무들은 쑥쑥 자랐고 마당에 그늘을 만들었다. 집 주인은 마당에 국화를 옮겨 심고 드나드는 문을 새로 달아주었고 동네 아이와 엄마가 익숙한 듯 드나들었으며 맞은편 찻집에서는 작가에게 저녁을 빨리 먹으러 오라 성화다. 이사는 다시 한 번 완료되었다. 그래서 작가는 공간과 이별을 하고 다시 훌쩍 자랄 준비가 된 듯 보였다. 아이가 자라면 이사를 가듯이 그렇게 잘 지낸 집을 떠난 사람, 작가를 만나니 이 전시는 작가의 입장에서 온전한 이사일 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집은 오래 움직이지 못해 많이 삐걱거리고 이제 주거할 사람의 드나듦을 경험하지 못할 정도로 쇠했지만 죽지 않았다. 나무를 손질하고 마당을 쓸고 사람을 맞이하며 주변의 모든 소리를 함께 듣는 사람이 있어 고단한 노년에도 멋이 있는 집으로 살아있다.

 

전시에서는 드러내지 않은 먼지와 곰팡이부터 살았던 사람이 붙인 스티커, 스크랩된 이미지, 끊어진 호스와 전깃줄까지 드나들지 않은 것 중 어느 하나 부정하지 않고 비닐로 감싸 그 위에 손을 얹어볼 수 있었기에 드나드는 모든 이는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비닐이 없었을 때는 보지 못한 것들이 거기 분명 있었고 적어도 12년간 그 곳에 있었던 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작가는 “다른 사람들도 이 집이, 이 모든 것이 여기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방법”이라고 전시를 설명했다. 낡고 오래된 집이라는 틀 안을 헤매던 나에게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는 말이었다.

물질을 소유하는 것은 한정적이다.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다투어야 한다. 여럿이 대상을 완전히 다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이 전시가 되면 관람자들 각자가 나름으로 하나의 비물질적 이사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 집에 대한 자신의 기억과 추억을 가지고 와서 다른 이의 기억과 추억을 발견하는 작은 이사다.

공간의 가능성은 물건이 공간에 가득할 때 사라지고 공간이 비었을 때 확장된다. 지금부터 소멸하기까지 이 집은 확장된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을까. 그리고 작가 고사리는 또 본인이 직접 사용하지도 않는 방을 늘 쓸고 닦고 살피던 어머니처럼 누군가의 삶이 두고 간 것들을 가꾸어 드러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그 집에 이사 갈 것이다. 드나들지 않는 것들을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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